잊어버린다는 것, 사람에게 주어진 축복

기타등등 2010.12.06 21:09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사람'에 대한 연구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미국, 러시아 등에서 진행하는 연구라는데, 이 말은 이런 사람이 한 명 이상이라는 뜻이다. -난 많은 것을 잊어버리는 관계로- 기억이 분명하지 않지만 내가 본 글에는 (아마도) 미국에서 진행하는 연구 대상자와의 인터뷰 내용도 담겨 있었다. 그 얘기를 하기 전에 잠깐 생각해보자.

당신이 모든 것을 기억한다면. 말 그대로 태어나서부터 (아주 어린 유아기인 2살 혹은 3살 이전의 기억만 제외하고)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을 기억한다면 어떨까? 한 번 본 책의 내용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으며, 한 번 들은 교사의 말도 죄다 기억하고 단 한 번 흘깃 쳐다본 영어 단어도 기억한다면? 초등학교 때부터 줄곧 전교 1등에, 수능 최고 점수를 찍고 서울대 입학 후 하버드를 거쳐서.. 뭐 이런 인생을 살까? 모두가 기억하는 천재로 살며, '아인슈타인의 재현' 소리를 듣고 (아인슈타인은 일상 생활에서 기억력이 좋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소한 사실이니 무시하고) 30대에 노벨상 팍 받아주고?

아래 내용은 순전히 저의 불완전한 기억을 기반으로 작성한 제 추론이며, 오류가 많을 수 있습니다. 정확한 사실 혹은 다른 의견을 가진 분의 제보 환영합니다.

실제로 이렇게 될지는 좀 있다 생각해보고, 우선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사람'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연구 대상이 된 사람은 중년 여성인데, 한 마디로 아주 불행한 삶을 살았다. 하버드 찍고 노벨상은 커녕, 변변한 직업도 없었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엄청난 기억력을 지녔는데, 왜 그의 삶이 불행했을까. 왜 그는 최고의 학자나 경영자가 되지 못했을까. 여기에 인간의 기억에 대한 비밀이 있다. 콰광!

1. 불완전한 기억은 슬픔을 잊도록 돕는다

이 사람이 가진 가장 큰 문제는 살아오면서 겪은 모든 아픈 기억, 슬픔을 죄다 기억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누구나, 심지어 대한민국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이건희 회장조차 슬픔을 겪는다. 이건희 회장은 엄청난 자금력과 조직을 거느리고 있지만, 딸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아버지로서 딸의 죽음이 슬프지 않을리 없다. 그러나 아무리 큰 아픔도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희미해지며, 딸의 죽음을 처음 알게 된 순간 느낀 감정도 세월과 함께 조금씩 희석되기 마련이다. 매일 아침 눈 뜰 때마다 그 날의 감정을 그대로 느낀다면 어떨까. 매 순간 그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그 날의 아픔을 똑같이 느낀다면?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사람'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 점이다. 그는 부모의 죽음, 친구의 죽음, 연인과의 이별, 다른 사람에게 받은 상처. 이 모든 것을 하나도 남김 없이, 바로 그 순간의 감정 그대로 기억한다. 사랑하는 이가 자신을 떠나면 얼마간 지독한 절망에 시달리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상처도 조금씩 아물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다시 사랑을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감정을 절대로 잊지 못한다면? 사랑을 떠올릴 때마다 첫사랑이 준 상처가 그대로 떠오른다면 다른 사랑을 할 수 있을까? 그 아픔을 생생하게 느끼면서?

그는 연구자에게 말했다 한다. 매일 아침 눈 뜰 때마다 수십 년 전의 상처가 나를 짓누른다고. 그는 용서하지도, 화해하지도, 잊지도 못한다. 어떤 감정을 극복하기 위해선 적당한 '망각'이 반드시 필요하다.

2. 불완전한 기억은 창의적인 사고를 돕는다.

연구 내용 중 가장 놀라운 것은 연구대상자의 사고 능력이었다. 그는 무언가를 추론하는 능력이 극히 부족했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사람답게 어떤 정보를 주면 글자 하나까지 기억했다. 그러나 그 정보를 조합해서 무언가를 추론하거나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왜일까. 간단한 테스트를 한 번 해보자.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은 아마도 백설공주 이야기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 지금 잠시 읽기를 멈추고, 머리 속으로 백설공주 이야기를 떠올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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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롤 그만 내리고 떠올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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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났나? 그렇다면 그걸 입으로 소리내어 혹은 빈 종이에 대략 두어 문장 쯤 되는 분량으로 한 번 옮겨보자. 어떻게 되나? 백설공주는 새어머니를 맞아들이고, 그 새어머니는 '말하는 거울'에 홀랑 빠진 나머지 백설공주만 없어지면 지가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가 된다는 허무맹랑한 말을 믿고 백설공주를 내쫒고, 쫓겨난 백설공주는 역시 얼굴값 한답시고 낯선 남자 7명과 동거를 시작하는데.. 사과가 어쩌고, 왕자가 어쩌고. 뭐 이렇지?

나와 여러분이 이런 식으로 백설공주 이야기를 간략히 줄일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백설공주 이야기의 세세한 사실은 잊어버리고, 그 맥락만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백설공주 이야기를 짧게 줄이라면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 내용이 나온다. 하지만 가장 큰 줄거리는 아마 비슷하게 나올 것이다. 약간의 차이는 있을망정, 큰 흐름은 비슷하게 나온다는 얘기다. 바꿔 말하면, 어떤 사실을 요약하고, 그 핵심만을 끄집어내기 위해선 아주 상세한 사실들을 잊어버리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우리가 백설공주 이야기를 요약하려고 하는 동안 우리도 모르는 사이 잔가지를 조금씩 쳐내는 작업을 한다. 아니, 이미 잔가지는 우리 머리 속에서 지워지고 없다. 이 때문에 누구나 백설공주 이야기를 요약해서 말할 수 있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바로 이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는 이야기를 들으면 모든 세부적인 내용을 다 기억했고, 그래서 어느 것이 중요한 내용인지 판단하지 못했다. 큰 내용을 뭉뚱그려 합치고, 작은 부분을 생략하는 과정을 쉽게 하려면 '잊어버리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는, 잊을 수가 없었다.

3. 불완전한 기억은 통찰을 돕는다

사람이 다른 동물에 비해 특히 뛰어난 점은 패턴을 인식하는 능력이다. 인간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뇌의 중요도가 점차 높아졌고, 그러다보니 뇌는 그 크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엄청난 자원을 잡아먹는 '저효율 고소비 기관'이 되어버렸다. 그러다보니 뇌는 어떻게 하든 최소의 자원을 사용해서 죄대한의 효과를 얻으려 노력하게 됐고, 그러는 과정에서 '패턴'이란 걸 만들어냈다. 가령 이런 식이다. 우리가 어떤 소음을 처음 들으면 그 소음은 순간 우리의 주목을 끈다. 이 소리는 무슨 소릴까 생각하고, 과거에 이와 같은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고, 이게 나에게 나쁜 영향을 주는가, 주위 사람들은 이 소리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등등을 살핀다. (아니라고? 당신도 모르는 사이 뇌가 이걸 한다) 그러다 이 소리가 해를 끼치지 않으며, 주위 사람들도 이 소리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아울러 그 소리가 지속적으로 난다면 뇌는 이 소리를 하나의 패턴으로 저장한다. 그러곤 우리 의식 저편으로 보내버린다. 이 말은? 그 때부터 뇌는 이 소리를 무시한다는 뜻이다. 이 과정을 거쳐 뇌는 다른 중요한 일에 집중하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 소리엔 자원을 배당하지 않음으로 주어진 에너지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한다.

괜히 복잡하게 말했지만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푸세식 화장실에 처음 들어가면 똥냄새가 진동을 한다. 그러나 화장실에 쪼그리고 앉아 몇 분만 지나면 냄새는 사라진다. 페브리즈라도 뿌린 걸까? 아니다. 바로 위와 같은 과정을 통해 냄새를 무시하는 거다. 우리 뇌가 이 냄새를 하나의 패턴으로 저장해서, 어느 순간 우리는 냄새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다음 순간 뭔가 타는 냄새를 맡는다면? 뇌는 다시 그 냄새에 주의를 집중한다. 패턴이 변했기 때문이다.

이게 통찰과 무슨 관계냐. 큰 관계가 있다. 인간은 패턴을 인식하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했다. 이것은 반복되는 소음을 느끼지 못하는 역할도 하지만, 주위의 사물, 사실을 단순하게 만드는 데도 큰 역할을 한다. 넙적한 판이 위에 올려져 있고 그 아래 네 개의 길쭉한 기둥이 이 판을 받치고 있는 물체가 뭘까?

테이블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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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이다. 세상에는 수도 없이 많은 종류의 테이블이 있다. 그러나 위 사진처럼 생긴 물체를 보면 우리는 모두 한 눈에 알아본다. 그렇게 다양한 색깔과 형태의 테이블이 있음에도 이들을 모두 하나의 범주 '테이블'로 묶어서 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자잘한 디테일은 무시하고 큰 흐름, 바로 패턴을 알아보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통찰은 전체적인 것을 조망하고, 그 핵심을 꿰뚫어보는 능력이다. 통찰력을 가지려면 맨 처음 눈에 보이는 자잘한 것, 중요하지 않은 것을 쳐내는 작업부터 해야 한다. 백설공주 이야기를 요약할 때와 동일하다. 그럼 그 다음은 뭘까. 눈 앞에 있는 치장을 벗겨내면 그 속에 담긴 알맹이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 알맹이를 다른 알맹이와 엮어낼 수 있는 능력이 바로 통찰력이다. 둥근 테이블과 네모난 테이블이 있다. 겉으로는 조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이들의 본질은 같다. 둥글고 네모난 겉모습에 현혹되지 않고, 그 맥락을 연결하는 것에서 통찰이 생긴다.

여기 한 명의 뛰어난 경영 컨설턴트가 있다. 편의상 그를 5throck이라 부르자. 여러분이 아는 누군가의 닉네임과 똑같을 수 있지만, 절대 우연이다. 그는 고객의 요청을 받아 A사업과 B사업을 분석해 이를 융합한 새로운 사업 모델을 제안하려 한다. 이제 5throck은 가설을 세운다. 음. A는 이런 사업이고 B는 이런 사업이야. 그러니 이렇게 저렇게 하면 이 둘의 장점을 흡수한 모델을 만들 수 있을거야. 다음으로 그는 정보를 모은다. 무조건 많이 모으나? 아니다. 그는 많은 정보를 모으면서 중요도, 신뢰도를 판단하고 특히 자신의 가설에 반하는 정보를 찾으려 애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다. 뭘까?

그 답은... 음. 내 기억력이 불완전해서 잊어버렸다. 하지만 여러분은 나보다 기억력이 좋으니 답을 알 것이다.

그래서, 불완전한 기억은 행복을 만든다

나는 십여 년 전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아버지가 숨을 거두는 순간이 지금도 기억 속에 또렷하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난 그 때의 격한 슬픔을 조금씩 잊었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으면 더 좋았을테지만, 지금도 불현듯 그 분의 모습이 떠오르지만 그 때만큼 슬프지는 않다. 아버지 기일에 가족이 모이면 웃으며 아버지 생전의 에피소드를 얘기하고 이제 유치원에 다니는 조카들을 보며 아버지가 살아계셨으면 손녀를 얼마나 예뻐하셨을지 얘기한다. 슬픔에 겨워 우는 사람은 없다.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십여 년의 세월이 우리의 기억을 무디게 했고, 우리의 슬픔을 조금씩 희석시켰다. 그래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면서도 웃을 수 있게 됐다.

바로 얼마 전에 친구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문상을 다녀온 날 밤, 침대에 누워 돌아가신 내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 분의 목소리가 들리지만 이제 난 그게 진짜 그 분의 목소리인지 확신이 가지 않는다. 내 기억 속에서 조금은 변색됐을테고, 그러면서 내가 만들어낸 부분도 있을테니까. 그러다 우리가 무언가를 잊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나아가 우리가 제한된 기억력을 가지게 된 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까지 발전한 원동력이라는 데 생각이 닿아 이 글을 떠올렸다. 우리 기억은 유한하지만, 그 제약이 마음의 평안을, 필요한 순간에 적절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사소한 사항을 걷어버리고 핵심에 집중할 수 있는 통찰을 주었다. 바로 이 점에서 잊어버린다는 것, 망각은 축복이다.

친구가 아픔을 딛고 웃음을 되찾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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