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웨스트윙에 나오는 숫자 272의 의미는? -2편

기타등등 2010.07.21 22:59
1편에 이어.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였다. 승리는 플로리다 주의 결과에 달려 있었고, 투표일 이후 무려 한 달 동안이나 집계 결과를 가지고 옥신각신 하고 있다가, 마침내 대법원에서 재검표를 중단하고 플로리다 주의 선거인단 25명의 표를 부시에게 줌으로써 끝이났다. 그러나 어이 없게도 국민 투표의 결과는 이와 반대였다. 대통령에 당선된 부시는 47.87%인 5045만 6141표를 얻었고, 패배한 고어가 오히려 48.38%의 지지율로 부시보다 약 55만표 많은 5099만 6039표를 받았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은 왜일까. 1편에서도 말했다시피 이는 아주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아래 표를 한 번 살펴보자.


위 표는 가상의 대통령 선거를 5개 주에서 치르고 난 결과로 각 후보가 선거인단과 국민 투표에서 얻은 득표수를 뜻한다. 선거 결과 후보1이 3개의 주에서 승리해서 선거인단 표 중 67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됐다. 후보2는 아쉽게 61표를 얻어 6표 차이로 당선되지 못했다. 그러나 득표수를 보라. 득표수는 떨어진 후보2가 무려 200표나 더 많이 얻었다. 어떻게 해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후보1은 A, B, C 세 개의 주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B주를 제외하고는 모두 박빙에 가까운 승부를 통해 승리했다. 반면 후보2는 D, E 주에서 승리했는데, 모두 대승을 거뒀다.

이 결과가 뜻하는 바는 단순하다. 각각의 주에서 박빙의 차로 이기든 엄청난 득표수 차이로 이기든, 이기기만 한다면 아무런 차이가 없다. 비록 전국 선거 결과를 집계해서 총득표수가 많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후보1은 상대적으로 큰 두 개의 주에서 큰 승리를 거뒀고, 비교적 큰 주인 C 주에서는 20표 차이로, A 주에서는 고작 10표 차이로 졌다. 다시 말해 후보1이 큰 승리를 거둔 주는 가장 작은 주인 B 주가 유일하다.

물론 실제로 2000년 미국 대선이 이 정도의 차이를 보인 것은 아니다. 당연히 위의 표는 결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만든 것이니까. 하지만 원리는 동일하다.

실제 대선 결과로 보는 선거인단 제도의 아이러니

2000년 미국 대선의 결과는 아래와 같다. 붉은색이 부시(공화당), 푸른색이 고어(민주당)가 이긴 주를 뜻한다.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 [출처: 위키피디아]

언뜻 보고 '온통 붉은색이네?' 할지 모르지만, 그건 땅은 넓지만 인구는 적은 주(가령 서북쪽의 몬타나 혹은 노스 다코다 주는 땅은 넓지만 선거인단은 3명 뿐이다) 때문이다. 주 경계선을 따라 나눠 많은 땅을 따먹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땅따먹기 게임이 아닌 이상 땅의 넓이는 무의미하다.

미국은 동부연안 지역은 전통적으로 민주당이 강세이고, 남부 지역은 공화당이 강세이다. 남부 지역에서 '전통적으로'라는 말을 쓰지 않은 것은 사실 '전통적으로는' 미국 남부 지역이 민주당 강세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왜? 남북전쟁에서 승리한 링컨은 공화당 대통령이었다. 미국 남부 지역은 전통적으로 보수 성향을 띄지만 오직 그 이유 하나로 오랫 동안 공화당은 미국 남부 지역에 발을 붙일 수 없었다. 물론 대략 4, 50년 전부터 남부 지역 사람들이 원래의 정치 성향을 따라 공화당 지지자로 이동했지만.

아무튼 위의 두 개의 이미지가 보여주는 결과는 자명하다. 내 구역은 신경 쓰지 마라. 10표 차이로 이기든, 1만표 차이로 이기든 선거인단의 표를 싹쓸이 해오는 것은 똑같다. 똑같은 이유로 원래 남의 구역이었다면 거기도 신경 쓰지 마라. 그러니 당연히 경합지역에 선거운동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단순히 '몇 표를 받느냐'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국민투표에서 1표라도 이기면 그 주를 통째로 먹는다. 득표수를 전국 단위로 집계하는 것이 아니라, 각 주 단위로 집계하기 때문에 이런 결과는 필연적이다. 2000년의 경우 플로리다, 펜실베니아 주가 대표적인 경합지역으로 꼽혔다. 예상대로 역시 플로리다에서 승리한 부시가 당선됐다. 미국 지도 오른쪽 맨 아래 꼬리처럼 삐쭉 나온 곳이 플로리다 주다. 마이애미가 있는 그 플로리다 맞다.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 [출처: 위키피디아]

정중앙에 빨간색 4 옆에 '1'이 보이나? 여기가 네브라스카 주다. 네브라스카 주는 하원선거구 승자와 전체 주 득표수 승자에게 표를 나눠 준다. 위 지도가 뜻하는 것은 네브라스카 주의 한 선거구에서 오바마가 이겼다는 뜻이다.

2008년은 조금 결과가 다르다. 일단 2000년에 공화당이 승리했던 서남부 두 개 주(네바다, 콜로라도)에서 민주당이 승리했다. 플로리다 역시 오바마가 되찾아왔다. 그렇다면 득표수는 어땠을까. 오바마는 52.93%인 69,456,897표를 얻었고, 매케인은 45.67%인 59,934,814표를 얻었다. 한 마디로 53 대 46. 결코 오바마가 대승을 거뒀다고 할 수 없는 수치. 유시민 씨가 '부시 8년을 지내고도 오바마는 아슬아슬하게 이겼다. 53 대 46 아니냐. 이 정도도 못하면 미국인들은 소위 말하는 민주주의의 본산으로서 자격이 없는 거다'고 했을 만큼 오바마의 지지율은 높지 않았다. 그렇다면 선거인단 득표는 어땠을까? 365 대 173. 잘못된 숫자 아니다. 매직넘버 270을 훨씬 넘어버린 압도적인 승리였다.

2000년 선거에서 고어는 국민 투표에서 이기고도 졌고, 2008년 선거에서는 오바마가 국민 투표에선 아슬아슬하게 이기고도 선거인단 득표는 대승을 거두면서 승리했다.

그럼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가장 불리한 후보는 어떤 사람인가. 단순화 하긴 어렵지만, 많은 지역에서 골고루 지지를 받는 사람이 가장 불리하다. 골고루 지지를 받아 아주 근소한 차이로 고른 득표를 하는 것은 특정 주에서 완전히 박살 나고 특정 주에서는 근소한 차이로 이기는 것만 못하다. 선거 전략은 당연히 이에 따라 이뤄질 수밖에 없다. 어떤 주는 한 달이 멀다하고 후보가 찾아오고 후보의 TV 광고를 볼 수 있지만, 어떤 주는 선거 기간 내내 후보 얼굴을 한 번 볼까 말까 하고 TV 광고도 아예 없을 수도 있다. 한 쪽 후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양 후보 모두.

다른 주장은 없나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냐, 싶다. 미국 내에서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없느냐. 물론 있다. 특히 2000년 선거로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 선거인단 제도의 개선 혹은 폐지를 촉구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이 말하는 대안은 이렇다.

극단적으로는 선거인단 제도를 폐지하고, 직접 선거로 바꾸자는 주장이 있다. 혹은 작은 주는 선거인단 제도를 유지해서 후보들이 아예 관심을 갖지 않는 사태를 막고, 이외의 주는 직접 선거로 바꾸자는 주장도 있다. 절충안으로 선거인단 제도를 유지하되, 총 득표수가 많은 사람에게 상원에 배정된 선거인단 수만큼 표를 주고, 하원 선거구별로 이긴 사람에게 선거인단 표를 1표씩 주자는 주장도 있다. (이 제도는 메인, 네브라스카 주가 운용한다) 이 외에도 조금씩 절충한 여러 주장이 있다고 한다.

직접 선거로 바꾸게 될 경우 달라지는 점은 분명히 있다. 일단 전국적인 지지도를 높여야 하므로 각종 매체에 많이 의존하게 될 것이다. 직접 찾아가서 연설을 하기 보단 다양한 언론을 통해 연설을 할 가능성도 높아진다. 아울러 격전지 중심으로 전략을 세우던 것에서 자신의 안방으로 되돌아갈 가능성이 높다. 안방에서의 한 표나 적진에서의 한 표나 모두 동일한 한 표이므로, 오히려 지지자들이 많은 곳에서 좀 더 결집율을 높이려 할테니 말이다.

왜 바꾸지 않나

그렇다면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모아 공개 토론회를 하는 등의 절차를 통해 국민적인 합의를 끌어내어 변경을 하면 될텐데, 쉽게 그리하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이유1: 득표수와 지지율은 다른 문제다

이 문제는 직접 선거를 시행하고 있는 우리나라가 겪고 있다.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 사람들이 '33% 대통령'이라는 말을 했다. 무슨 말이냐고?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지지율은 전체 투표자 중에서 특정 후보에게 투표한 사람들의 비율이다. 여기서 문제는 모든 유권자가 투표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데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대통령 선거 투표율은 대략 70% 정도에 불과하며 그나마도 계속 줄어들고 있다. 이명박 현대통령이 당선된 지난 17대 대선에서는 62.9%로 역대 최저를 기록했다. 노무현 전대통령이 당선됐던 16대 대선의 투표율이 70.8%였으니 불과 몇 년만에 한참 떨어진 셈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득표율은 48.7%로 사상 최대 득표율을 기록했다고 한다. 그러나 앞서 말했다시피 유권자의 62.9%가 투표한 선거에서 얻은 수치일 뿐이다. 득표율은 사상 최대였을지 몰라도 실제 득표수는 노무현 전대통령보다 낮았다. 이렇게 전체 유권자 수 대비 득표율로 환산하면 노무현 전대통령은 34.3%, 이명박 대통령은 30.5%의 지지를 받았을 뿐이다. 그나마 전체 유권자 대비로 환산하면 김영삼 대통령 이후 4명의 대통령 중에선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율이 가장 높다. (참고 포스트)

이제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지? 직접 투표로 뽑는다고 해도 결국 전체 유권자의 30%가 지지하는 대통령을 뽑을 뿐이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자신의 선택을 밝히지 않는 침묵하는 유권자가 있다.

이유2: 서너 명의 후보가 각축전을 벌이면

사실상 민주, 공화 양당으로 나눠진 양당체제(물론 녹색당 등 소수당도 많다)의 미국은 두 명의 강력한 후보가 대선을 좌우한다. 그러나, 만약 또 한 명의 강력한 후보가 등장한다면? 가령 로스 페로처럼 엄청난 갑부가 클린턴 정도의 대중적 인기를 갖고, 오바마 정도의 연설능력을 보여준다면? 이 세 명의 후보가 골고루 표를 얻을 경우 전 유권자가 투표를 한다 해도 30%를 조금 넘는 지지율로 당선이 결정될 터다. 혹은 그만큼 강력하지는 않더라도 10% 정도의 지지율만 가져올 수 있으면 전체 판도를 혼돈에 빠뜨릴 수 있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우리나라 지방 선거나 대선에서도 이런 일이 종종 벌어져 왔다.

이유3: 작은 주들도 힘을 원한다

선거인단 3명만 할당된 작은 주라 하더라도, 해당 주가 박빙의 승부를 보일 경우라면 양상이 달라질 수 있다. 평소 관심도 가지지 않던 후보자들의 관심을 끌어낼 수 있는거지. 앞서 말했다시피 미국 대선은 격전지를 누가 잡아내느냐가 승부의 관건이다. 만약 이런 작은 주들이 격전지로 드러날 경우 대선 후보들은 어쩔 수 없이 작은 주에 관심을 가질테고, 작은 주들은 그에 편승해 좀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거나 이를 이용해 향후 정치적인 약속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마무리

미국 대통령 선거는 우리도 폐지한 간접선거 제도를 아직도 유지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간접선거의 장점이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미국 정치의 역사가 얽혀 있는 문제이므로 쉽게 바꾸기 어렵다. 연방국가라는 특이성, 노예제도가 있었던 시기에 건국을 함으로 해서 만들어진 제도(비록 그 제도가 만들어질 당시의 배경이 모두 사라진 뒤라 해도), 아울러 너무나 거대한 규모의 땅덩어리와 각종 소수민족이 뒤얽힌 인구 구성에, 각 주들이 가진 정치적 이해관계까지 복잡한 이유가 섞여 있기에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관심을 갖지 않던 선거 제도가 2000년 대선의 충격적인 결과로 인해 수면으로 떠올랐고, 이에 따라 조금씩 변화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변화를 바라는 사람들이나 유지를 바라는 사람들 모두 합당한 주장을 갖고 있기에 단시간에 무언가 결론이 날 것이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선거인단 제도를 통해 어떤 식으로 정치적인 결정이 이뤄지는지, 가장 민주적인 제도라는 선거와 투표가 과연 진정 민주적인 제도인지도 한 번씩 생각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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