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고등학생이었던 시절, 시내 레코드 가게에서는 레코드만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었다. 레코드 가게에서 음반과 카세트 테이프를 판매만 할 뿐 아니라, 녹음도 해주곤 했었다. 녹음하고 싶은 노래의 제목들을 적어가서 -대략 15곡 내외- 레코드 가게에 가져다주면 그 노래들을 공테이프에 녹음해서 얼마간의 비용을 받고 판매하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서울이나 타 지방에도 이런 문화(?)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에만 하더라도 듣고 싶은 곡을 모아서 개인적인 '애창곡 모음 음반'을 만들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 중의 하나였다. ('더블 데크'라고 해서 카세트 테이프 두 개를 동시에 작동시킬 수 있는 오디오 기기가 한 때 꽤나 유행이었던 이유가 뭔지 생각해보라)

이렇게 녹음한 테이프의 용도는 아주 다양했다. 내 경우엔 주로 나 혼자 듣기 위한 용도로 만들었지만, 주위의 사람들은 이렇게 녹음한 테이프를 이성 친구에게 선물로 주거나, 로맨틱한 분위기를 만들 때 배경음악으로 사용하기 위한 용도로 많이 활용했다. '무드 송 모음집' 같은 컴필레이션 음반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음반을 판매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판매를 해야만 수익을 얻는 레코드 가게에서 이런 방식으로 복제 행위를 하는 것에 대해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아주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으나, 당시만 하더라도 그렇지 않았다. 라디오에서 DJ가 다음에 나올 곡의 곡명을 미리 얘기해 주는 것이 '예의'로 통용되던 시절이었고 (좋아하는 곡이 나오면 바로 녹음 버튼을 누르기 위해 손가락 하나를 '녹음' 버튼 위에 올려놓고 라디오를 듣던 시절이니), 아예 라디오 방송을 통째로 녹음해서 차곡 차곡 쌓아두었다가 좋아하는 곡만 편집해서 듣는 사람들도 많이 있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레코드점은 이런 식의 복제가 자신들의 매출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실제로도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영향을 줬다면 이 서비스는 금방 없어졌겠지.

2.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해서 듣는 것은 당시만 하더라도 널리 퍼져 있던 행위였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를 가능하게 해준 녹음, 녹화 기술이 처음 등장했을 때에는 해당 기기를 생산하는 업체를 향한 기존 저작권자들의 공격이 만만치 않았다. 레코드 판이 처음 등장했을 때에도 작곡가들과 연주가들의 엄청난 반발에 부딪쳤고, 신기술에 대한 공격은 그 후로도, 그 전에도 끊임 없이 반복되고 있다.

레코드 판을 구입해서 그것을 카세트 테이프에 복사한 다음 판매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불법이다. 멀리 볼 것도 없이 불과 1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길거리에서는 카세트 테이프를 판매하는 노점상들이 이러한 행위를 버젓이 자행하고 있었다. 당시에도 이 행위에 대해 처벌을 바라는 사람들이 분명 있었겠지만, 그 사람들의 목소리가 충분히 크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길거리 테이프 노점상을 단속하고 처벌해야 한다는 그들의 목소리가 충분히 컸다면 '길보드 차트'라는 말이 애초에 나오질 않았겠지. 그리고 그 와중에도 김건모는 백만장이 넘는 판매기록을 세웠다.

3.
내 친구 중에는 한 때 '팝 매니아'를 자처하던 이들이 몇 있다. 이들의 공통적인 추억담은 '레코드 판을 사서 그걸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한 다음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듣던' 것이다. 레코드 판에 흠집이나 날까 싶어 레코드 판은 고이 모셔둔 채 테이프만 늘어지게 들었던거지.

이들의 행위는 당시에는 법의 저촉을 전혀 받지 않았다. 레코드 판을 구입한 다음 그걸 테이프에 녹음해서 듣건, 친구에게 들어보라고 권하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이런 상황이 획기적으로 달라진 것은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기술의 발달이 시작되면서부터이다.

4.
티비를 보다가 우연히 '불끈 캠페인'이라는 것을 보게 됐다. '불법 음원 근절 캠페인'이란다. 이 캠페인에 참여한 가수들의 인터뷰도 등장했다. 몇 명의 가수들이 인터넷을 통한 음악 파일 다운로드에 대한 의견을 피력한다.

"다운 받아서 들어보니까 음질이 너무 안좋더라구요"
"자꾸 그렇게 들으면 귀가 나빠져요. 저도 (예전에 그렇게 많이 해서) 지금도 귀가 안좋잖아요"

하필 그 프로그램에서 이 인터뷰들을 내보낸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물론 그 인터뷰에 앞서 가수 박정아(내가 얼굴과 이름을 아는 유일한 가수였다)가 '음악은 그 가수의 영혼이 담겨 있으니 음반 전체를 들어보셨으면 한다'는 말도 했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박정아의 음반 전곡을 들어본 적이 없고, 제대로 한 곡을 끝까지 들어본 적도 없다. 그래서 그의 음악에 영혼이 담겨있는지에 대해선 알 수 없다. 하지만, 다른 가수들의 인터뷰에서 '음질' 운운 한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예전부터 공공연히 인정되어 오던 '사적 복제'가 디지털 시대에 오면서 물 위로 떠오르고, 규제의 대상이 된 것은 그 복제 매체가 '디지털'이라는 것에 있다. 디지털 파일은 특성상 무한 복제가 가능하며, 복제 시 파일 자체의 손상이 전혀 없다는 장점이 있다. 레코드 판이 흠집이 날까봐 테이프에 복사해서 듣던 내 친구들과는 달리 mp3 파일 원본이 닳을까 싶어 복사본을 만들어 듣는 사람들은 없다는 얘기다.

mp3라는 파일 포맷은 분명 CD와는 음질의 차이가 있다 -고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 다. 난 잘 모르겠다. 누군가는 제대로 된 오디오 시스템에서, 일정한 음질을 갖춘 스피커로 들으면 mp3와 CD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고 한다. 역시 난 잘 모르겠다.

그런데 말이다. 디지털 음원 복제 방식에 있어서 '음질'이 얼마나 영향을 주고 있을까. 현재 음반 산업의 주 고객층인 10대와 20대들이 자리에 앉아, 스피커를 갖춘 오디오 시스템에서 CD를 재생해서 듣고 있나? 그들이 음악을 듣는 방식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워크맨'으로 대표되는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로 음악을 듣던 20년 전의 고등학생처럼, 지금의 고등학생은 '아이팟'으로 음악을 듣는다. 주위의 소음과 뒤섞여 음악을 듣는 환경에서 음질은 그다지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음악을 듣는다'는 행위 자체만이 의미를 가질 뿐. 이런 현실에서 '불법 음원을 다운받아 듣지 마세요'하는 캠페인을 벌이는 가수들이 음질 운운하고 있으니. 방향을 잘못 잡아도 한참 잘못 잡았다.

5.
다시 20년 전으로 돌아가보자. 당시엔 내가 구입한 테이프를 복사해서 듣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장담하건데, 지금 전문적으로 음악을 창작하는 사람들, 그걸로 밥 먹고 사는 사람들도 그 시절엔 분명 그렇게 살았을거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아직 우리나라 가수들의 CD에는 잘 적용되고 있지 않지만, 외국 특히 미국 가수들의 CD는 복제 자체가 불가능하게 만들어져서 판매된다. 내가 CD를 정당한 댓가를 치르고 구입을 하더라도 mp3로 변환해서 듣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20년 전에는 가능하던 것이 지금은 불가능하다.

그럼 CD가 아닌 다른 분야는 어떨까. 최근 음반 시장은 엄청나게 축소되었지만, 그와 반대로 음원 시장은 엄청난 성장을 지속해왔다. 대표적인 예로 핸드폰 벨소리를 꼽을 수 있다. 벨소리 하나를 500원 혹은 1000원을 주고 구매하는 것은 저작권자가 안내한 적법하고도 정당한 방법에 의해 컨텐트를 구입한다는 점에서 CD를 사는 행위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 CD이전의 매체인 레코드 판과 카세트 테이프를 사는 행위와도 전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렇게 구입한 벨소리를 내 핸드폰이 아닌 다른 곳에서 재생할 수 있나? 가령 CD에 담아서 듣는다거나 친구에게 들어보라고 복사해 줄 수도 없다.

이 엄청나게 커진 음원 시장에서 가장 큰 힘을 가진 쪽은 가수도 작곡가도 심지어 소비자도 아닌 이동통신 회사이다. 거의 모든 핸드폰 사용자들이 특정한 곡을 벨소리로 쓰려면 정식으로 돈을 지불하고 구입하는 상황에, 더구나 대한민국에서 사는 사람들의 절대 다수가 핸드폰을 들고 다니고 있음에도 창작자들은 이 시장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기존의 음반 시장, 심지어 복제가 완전히 불가능한 이 시장에서조차 창작자들은 맨 나중에 가장 조금의 이득만을 볼 뿐이다.

5. 1.
사실 음원 시장만 사적 복제를 차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네이버 블로그에서 사용하기 위해 구입한 '폰트'는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사용권을 박탈당하는 형태로 판매되었다. 나도 컴퓨터용 서체를 구입한 경험이 있지만 한 번 구입한 서체는 영원히 나에게 사용권이 주어진다. 네이버에서 기간을 설정해 그 기간만 사용이 가능한 형태로 디지털 컨텐트를 판매하는 것은 전통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거의 사기에 가깝다.

비용이 저렴(일 이천원 수준이었던가?)하다고, 그러니 당연한 것 아니냐고 하지 말라. 서체를 전문적으로 제작하고 판매하는 회사들도 그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 금액에 서체를 판매하는 방식을 썼었다. (지금도 쓰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주 당연하게도 그렇게 구입한 서체의 사용권 역시 나에게 영원히 주어진다.

6.
장황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네그랴.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렇다. 나는 이 '불끈 캠페인'이라는 것이 아주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 캠페인의 취지를 인정 못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음악을 무단으로 마구 배포하자는 이야기도 아니다. 다만 '어떻게 하면 변화하는 현실을 붙잡아 과거로 되돌릴 수 있을까'만을 고민하는 그들이 못마땅하고 안쓰럽다.

이미 시대는 변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음악을 공유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그 사람들이 합당한 댓가를 치르고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으며 음악을 이용하도록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이 빠르다.

지금도 인터넷에서는 음원을 돈을 주고 구입할 수 있다. 미니 홈피의 배경음악도 구입할 수 있고, 특정한 곡을 구입해서 내 블로그에서 실행되도록 할 수도 있다. 이렇게 구입하는 음원이 한 곡당 500원에서 1000원 가량 된다. 분명 정당하게 돈을 주고 구입한 음악이지만 미니 홈피 혹은 해당 판매 사이트에서 정한 방식 외에는 감상이 불가능하다. CD를 팔면서 '이 CD는 맨 처음 재생한 CD플레이어에서만 재생되며, 이후 다른 플레이어에서는 재생이 불가능합니다'라고 써붙이고 파는 꼴이다.

가수 박정아는 가수의 음반 전체를 들어봐달라고 했다. 그래야만 그 음반과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러한 그의 바램과는 달리 아마도 박정아의 곡은 한 곡 한 곡씩 쪼개져서 디지털 음원으로 판매되고 있을거다. 그러한 거대 산업의 시스템 속에서 가수 박정아가 어떠한 역할과 권한을 갖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2008/03/28 08:40 2008/03/28 08:40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thinkofweb.net/tt/trackback/72

  1. Xanax class action.

    2008/08/27 21:46
    삭제
    Xanax. No prescription xanax. Xanax cocktail. Side effects of xanax.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로그인][오픈아이디란?]

◀ PREV : [1] : ... [65] : [66] : [67] : [68] : [69] : [70] : [71] : [72] : [73] : ... [130] : NEXT ▶

BLOG main image
인터넷과 자유 의지, 그리고... by mindfree

카테고리

전체 (130)
인터넷 이야기 (32)
마음속 땅 한 평 (15)
CC Korea (23)
기타등등 (59)
mindfree 소개 (1)
Total : 54749
Today : 147 Yesterday : 229